본 문 : 야고보서 1장 12~15절
여러분은 교회를 왜 다니십니까? 교회가 왜 세워진 것입니까? 어떤 조직이던 회사이던 모임이던 다 목적이 있기에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태권도장은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태권도장에서 태권도를 가르치지 않고, 유도를 가르치면 더 이상 태권도장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유도장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생선가게에서 생선이 잘 안 팔리는 겁니다. 그래서 생선 옆에 한우를 팔기 시작했는데, 생선 보다 한우를 더 잘 파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게는 생선 가게가 아니라 한우 파는 가게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생선을 팔기로 했다면, 생선을 팔아야 합니다.
교회는 도대체 뭐하는 곳입니까?
물론,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교회에 대한 여러 다른 생각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딱 한 마디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분이 피를 흘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주셔서 이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길을 여신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즉, 원리와 방법을 알면 쉬운데, 그것을 모르면 어렵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방법을 모르니까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하지는 않고, 인간의 교제의 장소, 문제 해결의 장소만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지금 2020년부터는 코로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점점 사람들이 교회에 꼭 나가야 하는가! 이런 회의적인 생각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터넷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만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치 전화로 자녀가 부모님께 안부를 묻습니다. 부모님을 만난 겁니까? 안만난 겁니까? 전화로 만나는 것하고, 직접 몸과 몸이 만나는 것하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유대 나라에 “고르반” 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부모님을 섬겨야 하는데,, 단지 하나님께 감사헌금 같은 것을 드리면서 고르반... 하고 외치기만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막 7:10~12]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고르반 하고 외치기만 하면,
이것이 부모를 공경한 겁니까? 공경하지 않은 겁니까?
공경하지 않은 겁니다. 신앙 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옳은 대로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이 되고, 영상으로 예배드린다고 해도 몸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훈련을 하는 곳.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 그렇게 변화되어 갈 때, 내가 죽어서 정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영원토록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입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예배 후에 식사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섭섭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예배 후에 점심 한 끼 해결하려고 오는 건가? 물론, 떡을 떼며 교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에도 초대교회는 날마나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집마다 돌아가면서 떡을 떼며 교제를 했거든요. 이것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연습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가족이면, 함께 먹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교회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그 만난 기쁨을 서로 식사를 하면서 나누면서 그 기쁨이 두 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보다는 더 신경쓰는 것이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느낌이 마치 음식 먹으러 교회에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것을 실패하면,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
교회는
예수님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 다 안 해도,,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 만나면, 그 교회는 성공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의 특징은 사람들이 잘 안 모입니다. 왜요? 재미가 없거든요. 무슨 재미요? 세상 재미요.
성경에 보면, 나병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나병은 옛날에는 한센병, 문둥병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성경에 나병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나병의 특징은 자기 몸이 썩고 있어도 썩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발에 못이 박혀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즉, 몸에 통증을 못 느끼는 병. 이 병이 바로 나병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병인 줄 모릅니다.
어느 날 나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막 1:40~42]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랬더니 즉시로 나병이 떠나가고 깨끗해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병을 치료하기 원하셨고, 원하는 자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선택했는가 하면, 바로 세상 재미를 설명해 주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함인데, 사람들은 무엇을 찾는가 하면, 세상 재미를 찾습니다. 그런데, 세상 재미를 찾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바로 나병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못이 그 사람을 찔러도 아픔을 못 느낍니다.. 뜨거운 물에 손이 데어도 아픔을 못 느낍니다.. 사람이 때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잘못 살고 있어도,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왜요? 나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를 못 만나도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지 못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있지 못해도 아무런 거리 김이 없습니다.
예수님 만나는 것은 잘 모르겠고, 어째든 세상 모임처럼 교회가 재미가 있어야 한다면서 재미있게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왜요?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못하고, 성도들이 교회에서 올바로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을 아주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법칙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시험... 헬라어로는 peirasmov"(페이라스모스)
영어로는 Temptation (템테이션. 유혹)
이 시험은 바로 유혹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시험, 즉 유혹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요.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는 사람은 시험을 참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잘 참는 사람이 얻게 되는 복이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시험을 참아야 합니다. 시험을 참아야 복이 오는데,
그러면, 시험을 참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구절을 보셔야 합니다.
[약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왜 시험을 받습니까?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다. 즉, 시험은 자기 욕심입니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모든 시험은 거의 다 자기 욕심입니다. 자기 욕심이 어디서 왔습니까? 이것이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미혹이 무엇입니까? 미혹은 낚시 할 때 미끼를 바늘에 끼고 던져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마귀가 미혹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미혹의 영. 미혹하는 영. 이라고 부릅니다.
[디모데전서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요한1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하와에게 마귀가 접근해서 선악과를 먹게 하는 것. 이것이 미혹입니다.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미혹의 영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을 떠나게 합니다. 순수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멀어지게 만듭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 만나고 싶다 라는 마음을 제거해 버립니다.
이 미혹의 영이 역사를 하게 되면, 우리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자기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 욕심이 무엇인가 하면요.
[로마서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빌립보서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로마서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배란 헬라어로 “코일리아” 즉 위장, 창자를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도 그들의 신은 배요... 라고 할 때, 코일리아. 위장, 창자를 말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재미있는 것, 배부른 것.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뭐라구요? 자기 배 채우려는 것, 자기 욕심 채우려는 것. 미혹의 영은 항상 자기 배를 채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미혹의 영이고, 자기 욕심이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 전에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자기 혼자 이렇게 쌓아 놓고 먹는 거예요. 남이 먹든지 말든지,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합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러분, 음식 욕심 내지 마십시오. 그게 다 자기 욕심입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교회에서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뭡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겁니다. 예배에 목숨을 거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의 욕심을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욕심을 참지 못합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갖고, 더 건강하고, 더 잘 입고..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욕심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잘되게 하려고. 얼마나 사람들이 애쓰고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요한1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것이 삼대 자기 욕심인데, 미혹의 영이 역사하면, 여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욕심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비판하는 자입니다. 정죄를 합니다. 교회는 어떼야 하고, 교회는 이렇게 운영해야 하고, 목사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저 성도는 왜 이래. 왜 저래. 이러면서 비판을 합니다. 왜요? 자기 욕심이라는 겁니다.
자기 배를 채우려는 겁니다.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눈에 보기에 만족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릅니다. 왜요? 나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은 죄를 낳고, 결국은 사망을 낳습니다. 즉, 죽는다는 겁니다. 엄청난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욕심을 참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않습니다. 먹고 싶어도 먹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을 합니다. 더 중요한 일이란? 예수님 만나는 것이지요.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 만나는 것이지요.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 만나는 것이지요. 가정에서, 일터에서 예수님 만나는 것이지요. 그 분과 동행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좋아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루 종일 예수님 생각을 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하루 종일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님 어떻게 만날까 하루 종일 생각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왜요? 배가 신이니까. 내 배고픈 위장 채우는 것이 최고니까. 마귀 유혹으로 인해,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예수님 생각할 시간이 어딨어. 할 일이 많은데, 예수님은 나중에 만나야지. 눈 앞에 당장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예수님하고 대화할 시간이 어딨어.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험이 들어 힘들 때만, 살려달라고, 엎드립니다. 살려주면, 나몰라라... 또 자기 욕심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들고, 죄를 짓고, 사망이 오고, 또 힘들다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고, 이렇게 다람쥐 챗바퀴를 돕니다.
그러면, 언제 주님 사랑하시겠습니까?
생명의 면류관은 다음에 설명드리겠지만, 생명의 면류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이게 어마어마한 것인데,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욕심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기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여러분,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계속해서 자기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자기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외치고 외치고, 선포하고 선포하고, 그래서 점점 나를 사랑하기보다는예수님을 점점 더 사랑하는 자로 변해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서 주님 오셨을 때,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서 영원토록 그 영광을 누리는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아멘~~~